지난주, 아이의 킨더가든 학부모 모임에 다녀왔다. 사실 가기 전까지 조금 긴장했다. 미디어에서 봐온 국제학교 엄마들의 이미지 때문이었다. 명품 가방을 들고 서로의 남편 직업과 아이 성적을 은근히 비교하는, 거만하고 특권의식으로 무장한 사람들. 나도 모르게 그런 그림을 마음속에 그려놓고 문을 열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만난 건 전혀 다른 얼굴들이었다. 이제 막 제주에 자리를 잡은 엄마들, 서울에서, 혹은 해외에서 저마다의 이유로 삶의 방향을 바꾼 사람들. 화려함보다는 어딘가 조심스럽고 겸손한 태도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평가하기보다 서로의 서투름을 이해하는 대화가 오갔고, 나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그저 듣는 쪽이었다.
영어 유치원 셔틀버스만 봐도 경기를 했어요.
한 엄마가 커피를 저으며 무심하게 꺼낸 이야기였다. 제주로 오기 전, 아이가 영어유치원 셔틀버스만 보여도 불안해 했다고 했다. 매일 아침이 전쟁이었고, 아이를 억지로 차에 태우는 게 하루의 시작이었다고. 그런데 지금은, 학교 앞에 도착하면 차 문이 열리기도 전에 친구를 보고 안전벨트부터 풀려고 손을 뻗는다고, 친구와 놀 생각에 마음이 급한 거라고 웃으며 말했다.
그 이야기를 듣는데 나도 우리 아이 생각이 났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비슷한 표정을 나도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문득 궁금해졌다. 그동안 이 아이들에게 '학교'라는 곳은 어떤 의미였을까. 도시에서의 학교가 성취의 공간이었다면, 여기 제주에서의 학교는 적어도 이 아이에게는 그저 친구들 만나서 노는 공간이 된것이다.
의사 선생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제주 가신다면서요?
옆에 있던 다른 엄마는 시력검사 이야기를 꺼냈다. 제주로 오기 전 마지막으로 받은 아이의 시력검사에서 꽤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책과 화면만 들여다보며 자란 아이의 시력이 생각보다 훨씬 나빠져 있었다는 거다. 의사 선생님께 그 이야기를 하니, 뜻밖의 처방이 돌아왔다고 했다.
제주 가신다면서요? 그럼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아요. 넓은 하늘이랑 푸른 들판, 하루에 두 시간 이상만 보여주세요.

시력을 지키는 처방이 약이 아니라 '풍경'이라니. 도시의 삶에 너무 익숙해진 우리 모두에게는 낯선 답이었을 거다. 그리고 그 낯선 답이,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여러 엄마들이 여기 있는 이유 중 하나가 됐겠구나 싶었다.
단어 하나라도 더 외우게 하던 엄마였어요
또 다른 엄마는 조금 머뭇거리며 고백처럼 말을 꺼냈다. 단어 하나라도 더 외우게 하고, 테스트 점수를 목표로 틀린 점만 지적하던 엄마였다고. '이곳에 오니 아이가 내 발음이 이상하다고 지적해 주네요.' 이제는 아이를 믿고 맡기는 연습을 하고 있다고, 쉽지 않지만 매일 조금씩 손에 힘을 빼는 연습이라고 했다.
그 말에 몇몇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이 모임은 아줌마들의 수다가 아닌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야 할 아이들의 미래에 대한 진지한 대화였다. 누구의 아이가 몇 점을 받았는지가 아니라, 아이가 어떤 어른으로 자라날지에 대한 이야기.
운동회 날, 애들이 팻말을 들었대요

대화가 육지의 운동회 이야기로 흘렀다. 동네 공립학교 운동회 날, 아파트 단지에서 소음 민원이 들어올까봐, 아이들은 아침부터 팻말을 들고 나섰다고 했다. '죄송해요, 오늘 시끄러울 거예요.' 그 이야기를 듣는데 소름이 돋았다. 마음껏 뛰어놀아야 할 날에, 아이들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는 것. 운동회에는 승자와 패자가 없다는 것. 아름답게 무승부란다.
여기 제주의 운동회는 엄마들이 아이들과 함께 뛰고, 흙바닥에서 넘어지고, 옷은 흠뻑 젖고, 다음날 근육통을 겪는 운동회. 처음엔 듣기만해도 번거롭고 걱정스러웠다. 그런데 이제는 안다. 엄마도 함께 곁에서 흙투성이가 되고, 아이는 스스로 일어서는 그 모든 과정이 아이의 진짜 자립을 위한 시간이라는 걸. 아이의 생각을 대신 책임지는 것도, 아이가 넘어지지 않게 미리 막아주는 것도 엄마의 역할이 아니라는 걸. 아이의 생각은, 결국 아이의 몫이라는 걸.
돌아오는 길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그날 들은 이야기들, 셔틀버스 앞에서 울던 아이, 넓은 하늘을 처방받은 엄마, 단어 하나에 매달리던 자신을 고백한 엄마, 팻말을 들었던 도시의 아이들. 모두 다른 사람의 이야기였는데, 이상하게 전부 내 이야기 같았다.
제주국제학교는 아이의 똑똑함을 시험 점수가 아니라, 스스로 행복해지고 자신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생각의 능력으로 판단한다. 아마도 이곳이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건 '문제를 해결하는 법'이 아니라 '삶의 문제에 대처하는 법'이기 때문일 것이다.
주어진 상황을 어쩔 수 없는 조건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진짜 자유의 핵심이 아닐까.
그날 나는 말보다 듣는 쪽이었지만, 그 이야기들이 나에게 말해준 것 같았다. 아이와 나, 우리 모두가 함께 진짜 자유를 누리는 제주의 삶을 꿈꿔도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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